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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일 베를린 여행: 베를린 시내투어2
    Europe 여행(2022~2023)/2022 Poland, Germany, Czech Republic 2022. 9. 12.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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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를린에 왔다면 누구나 한 번은 파리저광장 앞에 있는 이 거대한 브라덴부르크 문을 지나 4마리의 말이 끄는 평화를 상징하는 그리스 여신 '에이레네'가 승리의 여신 '빅토리아'로 바뀐 이 쿼드리가(quadriga: 청동 말 4마리가 이끄는 2륜 전차상) 조각상을 바라보며 기념사진을 남길 것입니다.

    이 '파리저(Pariser) 광장'의 '파리저'는 ‘파리(Paris)’를 뜻하는데 나폴레옹을 폐위한 기념으로 ‘사각형’이라는 뜻의 ‘피어에크(Viereck)’ 광장의 이름을 ' 파리저'로 바꾸었다니 프랑스와 프로이센(독일)이 서로 얼마나 견원지간이었는지 상상이 가시죠?


    이번 글에서는 지난 베를린 여행 글에 이어, 베를린 시내투어(브라덴부르크 문, 홀로코스트 기념 공원, 6월 17일 기념 광장, 테러의 토포그래피, 체크포인트 찰리) 그리고 한국 레스토랑 '소반'에 관해 공유합니다.


    5. 브라덴 부르크 문


    브란덴부르크문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Friedrich Wilhelm II, 1744~1797)가 선왕이 이룩한 업적을 과시하고 평화를 상징하고자 건축가 칼 고트하르트 랑한스(Carl Gotthard Langhans, 1732~1808)에게 짓도록 명해서, 1788년부터 축조돼 1791년 완공되었다.

    랑한스는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로 들어가는 관문인 프로필라이아(Propylaia: 열주문)를 참고해 브란덴부르크문을 건립했으며, 이 문의 높이는 26미터, 가로는 65.5미터, 세로는 11미터로, 도리아 양식의 기둥 12개가 받치고 있고 5개의 통로를 가지고 있다. 왕족이나 특별한 신분을 가진 자들만이 가운데 통로를 통과할 수 있었고, 일반 시민은 양쪽의 2개 통로로만 이동할 수 있었는데. 이렇게 신분에 따라 각기 다른 통로를 이용해야 하는 규정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엄격하게 유지되었다.(출처: 건축은 어떻게 전쟁을 기억하는가, 이상미 저, 인물과 사상사 2021년 7월 9일)


    브란덴부르크문을 세운 뒤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서 이 문을 처음으로 통과한 인물은 굴욕적이게도 나폴레옹으로, 1806년 10월 27일 나폴레옹은 군대를 이끌고 브란덴부르크문을 지나 베를린 궁전까지 행군하는 것도 모자라 루브르 박물관에 쿼드리가를 전리품으로 가져갔다.

    하지만 1813년 나폴레옹이 라이프치히에서 프로이센에 패배한 후, 1814년 프로이센의 에른스트 폰 퓌엘(Ernst von Pfuel, 1779~1866) 장군이 다시 이 쿼드리가를 되찾아 오는데, 이러한 역사를 조금은 알고 이 브라덴부르크 문을 올려다보며, 인간이 부여하는 상징물의 의미가 국가의 통합과 단합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자칫 그냥 조각상일 수도 있는 4마리 말이 끄는 여신의 조각상이 그 시대, 그 상황 속에서는 큰 의미가 부여되어, 다시 베를린에 오게 되었을 때, 베를린 국민들이 승리를 축하하며, 기뻐했을 그 커다란 함성이 귓전에 맴도는 듯했다. 우리 아이들도 프랑스와 독일의 이러한 역사 이야기를 재미있어하며 쿼드리가를 연신 올려다본다.


    1933년 집권한 히틀러의 나치 정권 역시 전쟁에서 승리할 때마다 행군하는 군사들에게 이 문을 지나가도록 하여, 브라덴부르크 문은 개선문으로서의 역할을 긴 역사 속에서 지속하다, 제2차 세계대전 말, 연합국의 공습으로 쿼드리가의 4마리 말 중 한 마리의 말만이 온전히 남을 정도로 훼손되어 방치되었다가, 종전 이후 복원되었다.


    1989년 11월 9일, 마침내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지고 개선(凱旋), 분단, 그리고 냉전의 상징이었던 이 브란덴부르크 문은 이제 다시 통일의 상징이 되어 베를린을 묵묵히 내려다보고 있다.

     

     

    #사연많은 쿼드리가의 4마리 말들이 보인다.

     

     

    #베를린의 상징인 브라데부르크문

     

     

    6. 홀로코스트 기념 공원(DENKMAL FÜR DIE ERMORDETEN JUDEN EUROPAS)


    홀로코스트 기념 공원은 1930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나치에 의해 학살된 수백만 명의 유럽 유대인들을 추모하기 위해 2005년 우여곡절 끝에 완공되었다. 축구장 2개 크기(1만 9073㎡)의 부지에 콘크리트 비석 2,711개가 바둑판처럼 격자 모양으로 늘어서 있으며 위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거대한 심연의 물결이 출렁이는 것처럼 보인다.


    미국의 건축가 피터 아이젠만(Peter Eisenman)의 작품으로 원제는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기억물'이다. 피터 아이젠만은 우리나라의 ‘광주 폴리1’에 참여해 ‘99칸’ 작품(광주 읍성의 북문 터에 위치)을 설계하는 등 광주와도 인연이 있는 작가이다.(출처: https://www.gwangjufolly.org/bbs/board.php?bo_table=ko_folly1_fo&wr_id=6)

     

    99칸 > 폴리1작품소개(국문) | GWANGJU FOLLY

    전통적으로 한국의 주택이나 건축물은 칸수로 소유주의 사회적 지위를 드러냈다. 1910년 조선왕조가 막을 내릴 때까지 왕가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99칸을 넘는 건물을 세우지 못하였다. 미국의 건

    www.gwangjufolly.org

     

     

     

    # 이 날 베를린의 날씨만큼이나 우울해 보였던 홀로코스트 기념공원

     

     

     



    높이가 제각각인 조형물 사이를 지나가다 보니 좁고, 막힌 폐쇄된 공간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 그리고 방향 감각의 상실 등 여러 가지 낯선 느낌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것이 피터 아이젠만이 그 당시 유대인들이 가스실에서 혹은, 수용소에서 느꼈을 감정들을 고스란히 현세에 전하려는 의도인가 보다.
    위에 올라서거나, 뛰거나, 앉는 등의 행동은 삼가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관광객들이 있어 눈살이 찌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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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6월 17일 기념 광장(PLATZDES17.JUNI.1953)


    지나가다 커다란 벽화와 바닥의 작품들이 시선을 끈다.
    1953년 6월 17일, 이곳에서 동독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 반정부, 자유를 위한 민중 봉기가 일어났고 이를 기리기 위한 기념 장소로 이벽화는 1952년 제작된 동독의 체제 선전을 위한 전형적인 정치선전적 미술 벽화이며, 바닥에는 그날 참여한 민중들의 이미지가 담긴 작품이 이 벽화와 똑같은 크기로 설치되어 있다.

     

     

    # 동독 노동자들의 자유민중봉기의 바닥이미지
    # 6월 17일 기념광장의 동독 전형적인 propaganda 미술 벽화

     

     

    8. 테러의 토포그래피(TOPOGRAPHIE DES TERRORS)


    베를린의 장벽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곳 중 하나로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기 이전 1933 ~ 1945년 사이 독일 나치 비밀경찰 게슈타포(Gestapo)의 본부이자 독일 제국 총독부(Reichsführer-SS)가 있던 핵심 장소로 나치 시절 프로파간다와 테러에 대한 자료들을 보여주는 전시장(Neubau der Stiftung Topographie des Terrors)도 함께 있다.

    입구부터 전시물을 보며 걸어 들어가다 보니, 아뿔싸! 시간의 역순이 되어, 1933년부터의 시간순으로 보고자 할 경우에는 입구의 저 안쪽으로 들어가서 입구 쪽으로 걸어 나오도록 해야 한다.

    2013년 개봉한 영화 <베를린>에서 하정우가 이곳 장벽을 걷는 신이 나온 장소라고 하는데 기억이 나질 않아, 다시 영화를 봐야 할까 보다.

     

     

    # 베를린 장벽이 남아있다.

     

    # 야외 전시, 베를린의 1933 ~ 1945년을 알 수 있다.

     

     

    9. 체크포인트 찰리(Checkpoint Charlie)

    베를린에 장벽이 생긴 후, 동서독인들이 출입을 했던 곳들이 있었는데 체크포인트 찰리는 주로 군인들이나 외국인, 연합국 측 인사들이 지나다닐 수 있는 8개의  통로 중의 하나이다.

    "찰리(Charlie)라는 검문소 옆 사진의 미군 병사가 이곳 검문소에서 근무를 해서 이런 이름이 붙어졌나?" 했더니, 띠로리~! "롸저, A:알파, B:브라보, C:찰리... "  무선, 군대 용어, 일명 포네틱 코드(Phonetic Code)의 그 찰리였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소나기가 내린다.

    베를린에 온 후로, 기온이 갑자기 너무 떨어져, 30도가 넘는 비엔나에서 출발한 우리 가족은 덜덜 추위에 떨어야 했다. 아니 주변을 보니, 현지인들은 긴 팔에 잠바, 얇은 패딩 재킷까지 걸쳤는데, 관광객들은 다들 한여름 옷이다. 베를린의 날씨란...

     

     

    소나기를 잠시 피해있다, 노랑노랑 베를린 지하철을 타고 최대한 숙소와 가까운 한국식당을 검색해서 '소반'으로 향한다. 유럽은 항상 음료를 먼저 주문하고, 메인 음식을 기다리는 문화라, 맥주를 즐기는 나는 당연 맥주를 주문한다. 맥주병의 겉 디자인이 너무 나의 취향스러워, 맥주 맛까지 엄지 척! 알코올 함량이 5.1%인데  쓰지도, 목에 걸리지도 않은 채 바로 부드럽게 목구멍을 적신다.

     

    Rothaus Pils,

    그립구나 너란 맥주!

     

     

    순두부백반, 불고기 백반, 떡만둣국, 짬뽕밥.. 1인분이 거의 2인분인 양으로 아주 푸짐하다. 이틀 연속 '소반'에서 한국 맛을 느꼈고, 베를린 전체  마스터 카드결제기의 문제가 있던 시기라, 본인의 다른 카드로 결제를 대신 흔쾌히 해 준 한국 아르바이트 생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베를린에 가시면 소반에 꼭 들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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